무등산 무돌길

무돌 3길 (덕령길)

햇살과 뜨락 2023. 5. 8. 20:35

무돌 3길 (덕령길)

 

세 번째 길은 주변에 김덕령장군과 관련된 유적과 전설들이 유독 많이 담겨 있는 곳이어서 ‘덕령길’이라 이름 지어졌다. 배재마을에서 금정이주촌으로 내려가는 길, 논둑에 돌보는 이 없는 선돌 하나가 외롭다. 금정이주촌은 원효사 집단시설지구, 그러니까 무등산장 주변에 거주하던 20여 가구를 이주시켰던 곳이다. 지금은 몇 가구 남아있지 않다. 충장골 숲길은 의외로 생경하다. 배재마을의 충장사에서 벚꽃 아름다운 아스팔트길로만 금곡마을로 다녔던 까닭이리라. 참! 이런 길이 있었다니, 그러니까 금곡과 배재 사람들이 삶의 이야기를 소통하던 지름길이 바로 여기로구나 싶었다.

금정이주촌에서부터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이 제법 운치 있다. 솔숲 사이로 언뜻 보이는 몇 채의 전원주택이 조금은 탐탁찮지만 한가롭고 아늑한 산골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내리막길 막바지에서 굳건하면서도 멋들어진 자태를 갖춘 소나무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한참 올려다보고 머뭇거리다 다시 걷는 길가에서 갑작스럽게 선돌을 만난다. 이런 곳에 웬 선돌? 자세히 보니 ‘제주양씨세장산(濟州梁氏世葬山)’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그럼 그렇지! 선돌이 있을만한 자리가 아닌데……. 아담한 금곡저수지를 멀리 바라보며 걷다 보니 들판이 넓어지면서 금곡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숲길이 너무 빨리 끝나 버림이 아쉽다.

금곡마을은 무등산 북쪽 계곡인 원효계곡이 마을을 끼고 휘돌아 흐르는데, 마을 한 가운데로 충효동 가는 길이 나는 바람에 마을이 두 개로 나뉘어 버렸다. 5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이 마을은 남평 문 씨 일촌이었으나 지금은 타성도 더러 들어와 살고 있으며 90여 가구에 이르는 제법 큰 마을이다. 벼농사가 주업이며 포도재배, 약초로 사용되는 작약재배 등을 겸하고 있기도 하다. 금곡이란 이름은 이 지역에서 쇠가 생산되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고 우리말로는 쇳골이라 했으며 서촌이라 불리기도 했다.

무돌길은 금곡마을에서 ‘무등산 옛길’ 제 3구간과 교차한다. 자칫 옛길을 따라가기 쉬우므로 안내표시를 잘 살펴야 한다. 무돌길 중 거리가 짧은 길에 속하지만, 주변에 문화유산이 제법 많아 쉬엄쉬엄 살피면 한나절이 넘는 길이 되기도 한다. 무등산 원효계곡 위쪽으로 금곡동 도요지와 분청사기전시관이 있고 김덕령장군의 아우인 김덕보의 풍암정, 장군이 칼을 만들었다는 주검동과 야철지도 있다. 원효사도 둘러볼만한 절집이며 마을 아래쪽 계곡에는 삼괴정이 있다.

금곡동 도요지는 마을 맞은편 구릉의 경사면을 따라 넓게 펼쳐져 있는 가마터로 사적 제141호이다. 그 초입에 분청사기전시관이 세워져 있다. 가마터는 지암재와 풍암정 주변의 경사면에 있으나 찾아보기는 힘들다. 이곳에서 청자를 비롯한 분청사기, 백자 등 다양한 자기 파편이 발굴되어 조선초기부터 중기에 이르는 도자기의 변천과정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특히 소박하고 담백한 분청사기가 많이 발굴되었다. 분청사기전시관에는 분청사기 제작기법인 도장찍기, 깎아내기, 긁어내기, 훑어내기, 담가내기 등의 분장기법을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해 놓았다.

분청사기전시관에서 단풍나무 가로수 길을 따라 올라가면 풍암저수지에 이르고 거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풍암정에 다다른다. 풍암정은 원효계곡 깊숙한 곳에 있는데, 가을날 바위와 단풍과 계곡의 물이 어울리면 그야말로 절경이다. 앞면 2칸, 옆면 2칸에 팔작지붕을 올리고 한 칸짜리 방을 들여 놓은 아담한 정자이다. 이 정자의 주인인 김덕보(金德普)는 맏형 덕홍이 전사하고, 중형 덕령마저 무고하게 옥사하자 이곳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굳세게 곧은 전나무와 힘찬 삐침으로 획을 그은 소나무도 예사스럽지 않다.

주검동과 야철지는 무등산 원효계곡 상류 무등산장을 지나 삼밭실로 올라가는 길 왼쪽에 있으나 쉽게 찾기 힘들다.

이곳은 김덕령 장군이 장차 국난이 닥칠 것을 예견하고 일찍부터 이 골짜기에 숨어서 칼과 창 등을 만들었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거기 큰 바위에 ‘만력계사 의병대장 김충장공 주검동(萬曆癸巳 義兵大將 金忠壯公 鑄劒洞)’이란 글이 오목새김되어 있다. 야철지는 주검동 근처에 있는데, 제철과 단조철기생산(鍛造鐵器生産)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한다.

다시 마을로 내려와 삼괴정(三愧亭)으로 향한다. 금곡마을에서는 세 곳의 당산이 있었다 한다. 할아버지당산은 마을가운데 있는 귀목이었으나 베어지고 큰 할미당산은 동네 논가운데의 들돌인데 논주인이 논둑을 막는 데 사용해 없어졌다. 작은할미당산은 남근형태의 입석으로 꾀꼬리당산이라고도 불렀고 지금은 삼괴정 옆으로 옮겨 놓았다. 삼괴정은 문병일(文炳日)에 의해 1900년도에 세워진 정자로 앞면 3칸, 옆면 2칸에 한 칸짜리 방을 들이고 지붕은 평기와를 올렸다. ‘삼괴’란 세 가지 부끄러움을 일컫는데, 학문을 이뤄 출세하지 못함과 재산을 지키지 못함, 자식을 잘 가르치지 못함을 말한다고 한다. 삼괴정 곁 커다란 동백나무 그늘에 애써 다듬은 흔적이 역력한 남근석이 자리 잡고 있다. 바로 꾀꼬리당산으로 아들 낳기를 기원하는 아낙들이 치성을 올리던 곳이다. 삼괴정과 남근석을 살피는 것으로 덕령길 답사를 마무리를 하고 계곡을 건너 네 번째 길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