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봉황산 부석사(榮州 鳳凰山 浮石寺)
영주 봉황산 부석사(榮州 鳳凰山 浮石寺)
부석사 소개
부석사는 백두대간 태백산 끝자락 봉황산에 자리 잡은 화엄십찰 중 하나이다. 삼국이 통일되던 676년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부석사가 있는 풍기 지역은 그리 깊은 산중이 아니어서 물산이 풍부하고 죽령을 오가는 주요 교통로와 가까운 곳에 있어 오랫동안 절집이 유지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부석사는 봉황산 중턱 가파른 경사면에 돌로 석축을 쌓아서 터를 조성하였고 거기에 건물들을 올려놓았다. 주불 전인 무량수전과 그 앞 안양루에 올라서면 시야가 툭 터지면서 소백산맥줄기가 펼쳐진다. 무량수전과 조사당은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목조 건축물이다. 남국신라 때의 전형인 쌍탑식 가람배치와는 달리 무량수전 동쪽 언덕에 1기의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고, 무량수전에 모셔진 불상도 측면으로 앉아 동쪽을 향하고 있다. 조사당은 무량수전 뒤편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데, 내부에는 가장 오래된 불전 벽화가 있다. 부석사는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한 수덕사, 봉정사 등 오래된 국보급 불전 건물이 있는 절집들과 비슷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화엄종
교학 불교는 나름의 뚜렷한 종파성을 띠는데 가장 특징적인 종파는 화엄종과 법상종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전법사실이 뚜렷하고 종찰이 확실한 것이 의상의 화엄종이다.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찰로 초조인 의상 이래 그의 제자들에 의해 지켜져 온 중요한 절집이다. 의상은 676년 부석사에 자리 잡은 뒤 입적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그의 법을 이은 법 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석사 원융국사비에는 지엄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의상이 다시 제자들에게 전법하여 원융국사에까지 이른 것과 원융국사가 법손이 된 뒤 부석사에 자리 잡았다는 사실 등이 밝혀져 있다.
부석사는 의상이 중국 유학 후 수도처로 삼아 안주하다가 뒷날 큰 절집을 이룬 곳이다. 그러나 부석사의 창건과정을 정리한 역사적 기록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비석에 남긴 기록과 절의 재건, 보수 등의 기록이 전할 뿐이다. 부석사의 창건은 『삼국사기』에는 의상대사가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창건했다고 전하며 『삼국유사』에는 “의상이 태백산에 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세우고 대승불교를 포교하니 신자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고 전한다. 이런 기록들에 의하면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2월에 의상대사가 문무왕이 뜻을 받들어 창건했다.
의상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소백산이나 태백산 등지에 초가를 짓고 불경을 강의하거나 토굴에서 화엄세계의 심오한 뜻을 닦은 것으로 보아 7세기 후반의 부석사는 의상의 영정이 있는 조사당을 중심으로 초가집이 몇 채 있는 아주 청빈한 양상이었을 것이다. 의상의 제자인 신림 이후 부석사는 인적 물적 측면에서 차츰 변화했다. 신림은 훌륭한 제자를 많이 배출하였으며 화엄종을 크게 키웠다. 또한 규모면에서도 크게 변모하여 현재 부석사의 기본 구조라고 할 수 있는 대석단과 석등, 석룡, 장대석, 석탑 등이 경문왕 무렵에 건립되었다.
대석단은 불국사‚ 원원사, 망해사 등에서 볼 수 있듯 신라 하대에 세워진 절집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양상이다. 무엇보다도 석등이 경문왕 때(861∼874)에 만들어진 점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대규모 절집 건립이 가능했던 것은 신림이 배출한 수많은 화엄대덕들이 국가로부터 상당한 물질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예컨대 부석사에서는 신라 왕의 상을 그려서 벽화로 걸어 놓고 있을 정도였다. 후삼국 시기에 궁예가 이곳에 이르러 벽화에 그려진 신라 왕의 상을 보고 칼을 뽑아 내쳤는데 그 흔적이 고려 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부석사가 자리 잡은 태백산은 신라 오악 가운데 하나인 북악(北岳)으로 불려지던 곳이다. 따라서 의상의 법 손들을 북악 파라고도 하였다. 화엄종의 본찰인 부석사는 신라 하대에는 대석단 위에 세워진 규모 있는 절집으로 발전해 많은 사부대중들이 생활하는 곳으로 변하였고 승려가 되기 위해 처음 출가하는 곳으로 유명해졌다.
원융대덕은 이곳의 주지로 있으면서 대장경을 인쇄하였고 그 일부를 부석사와 안국사에 봉안하였다. 따라서 지금 부석사에 전해지는 화엄경판은 원융 대덕 때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구한말 민속학자인 이능화선생의 『화엄경 판고』에 의하면 “고려 초에 태백산 부석사에서 2종의 화엄경을 목판에 각했다.” 고 하였다.
부석사에 현존하는 원융대덕의 비문에 의하면 그의 성은 김 씨이고 자는 혜일이었다. 복흥사에서 수계 하고, 28세에 대덕이 되었다. 정종 때 왕사, 문종 때는 국사가 되었다. 그가 귀산사에 유행하였을 때, 꿈에 미륵보살이 나타나서 “네 품속에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해요‚ 다른 하나는 달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는데 이 일이 있은 뒤 자를 혜일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는 정종 7년(1041)에 부석사에 들어가 화엄종통을 이어받았다. 1053년 부석사에서 세수 90세‚ 법랍 78세로 입적하자 왕은 원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부석사 동쪽 언덕에 있는 원융국사비의 건립 연대는 명문의 마멸이 심하여 확인할 길이 없으나 입적 이듬해인 고려 문종 8년 (1054)으로 추정된다. 비문에는 의상 당대 부석사의 모습과 그의 법손들이 줄곧 이곳에 주석해 온 것을 알려 주는 귀중한 내용이 담겨있다. 고려 때에는 많은 건물들이 중창되었다.
조선시대에도 부석사를 중수한 기록은 자주 발견된다. 조선 성종 21년(1490)에 조사당을 중수하였고 성종 24년에 조사당에 단청을 하였다. 명종 10년에 화재로 인해 안양루가 소실되었으며 선조 6년에는 조사당 지붕을 개수하였다. 선조 9년부터 11년까지 석린 스님이 안양루를 중건하였다. 광해군 3년에는 폭풍우로 인해 무량수전의 중보가 부러져 중수하였고 경종 3년에는 무량수전 본존불의 금색을 다시 했다. 영조 22년에 화재로 승당 ‚ 만월당 ‚ 서별실 ‚ 만세루 ‚ 범종각 등이 소실되었으나 그 이듬해에 중수하였고 영조 44년에는 무량수전 본존불의 금색을 다시 했다.
일제 강점기인 1919년에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해체 수리하였는데, 이때 허리 부분이 잘린 석룡(石龍)이 노출되었다고 한다. 또한 무량수전 서쪽에 있던 취원루를 동쪽으로 옮기고 취현암이라 한 것도 이때라고 한다. 1967년에 부석사의 동쪽 옛 절터에서 쌍탑을 옮겨 범종각 앞에 세웠고 1969년에는 무량수전 기와를 갈았으며 1977년부터 1980년에 걸쳐 전체적으로 정화하면서 일주문‚ 천왕문‚ 승당 등을 신축하였다.
부석사의 주요 문화재
무량수전(국보)
부석사의 주불 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린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가운데 하나다. 역사적으로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알려져 있지만 건물 규모나 구조 방식‚ 법식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무량수전에 비하여 다소 떨어진다. 그러므로 무량수
전은 고대 불전 형식과 구조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원융국사비문」에 의하면 고려 현종 7년 원융국사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1916년 실시된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서북쪽 귀공포의 묵서에는 공민왕 7년 왜구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서 우왕 2년에 원융 국사가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건축 양식이 고려 후기 건물과 많은 차이를 보이므로 원래 건물은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 13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광해군 3년에 서까래를 깔고 단청을 하였고 1969년에는 번화 보수하였다.
[원융국사비문]에 의하면 고려 현종 7년 원융국사가 무량수전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1916년 실시된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서북쪽 귀공포의 묵서에는 공민왕 7년 왜구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서 우왕 2년에 원융국사가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건축 양식이 고려 후기 건물과 많은 차이를 보이므로 원래 건물은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 13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광해군 3년(1611)에 서까래를 깔고 단청을 하였고 1969년에는 번화 보수하였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 측면 3칸 규모인데 평면의 경우 건물 내부의 고주 사이에 형성된 내진 사방에 한 칸의 외진을 두른 형식을 취했다. 기둥 사이의 주간 거리가 크고 기둥 높이도 높아 건물이 당당하고 안정감 있게 지어졌다. 지붕은 팔작 형식인데 지붕의 물매는 후대 건물에 비하여 완만하다. 예로부터 건물의 구조는 단면에 위치한 도리의 수를 셈하여 말하는데 이 집은 소위 9량 집으로 외목을 제외한 도리가 9개나 되는 큰 건물이다.
면석과 갑석을 짜 맞추어 만든 가구식 기단과 사갑석을 받치는 지대석이 돌출된 계단‚ 원형 주좌와 고막이를 가진 초석의 법식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기법을 계승한 것이다. 계단 동측면에 선각된 ‘충원적화면(忠原赤花面) 석수 김애선’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무량수전은 고려시대의 법식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 주지만 그 가운데 가장 유의하여 볼 부분은 평면의 안허리곡(曲)‚ 기둥의 안 쏠림과 귀 솟음‚ 배흘림‚ 항아리형 보 등의 의장 수법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착시에 의한 왜곡 현상을 막는 동시에 가장 효율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하여 고안한 고도의 기법들이다.
안허리곡은 보통 건물 중앙보다 귀부분의 처마 끝이 더 튀어나오도록 처리한 것을 말하는데 기둥의 안 쏠림과 관계가 있다. 안 쏠림은 기둥 위쪽을 내부로 경사지게 세운 것이다. 무량수전에서는 안허리곡과 안 쏠림이 공포와 벽면에까지 적용되어 마치 평면이 오목거울처럼 휘어 있다. 귀 솟음은 건물 귀부분의 기둥 높이를 중앙보다 높게 처리하는 것인데 수평 부재의 끝부분이 아래로 처져 보이는 착시를 막아준다. 기둥의 배흘림 역시 기둥머리가 넓어 보이는 착시 현상을 막기 위한 것인데 무량수전의 기둥은 강릉 객사문 다음으로 배흘림이 심하다.
무량수전의 공포 형식은 기둥 위에만 배치된 소위 주심포계인데 매우 건실하게 짜였다. 주두 위에서 공포의 짜임이 시작되고 벽면 방향의 첨차와 튀어나온 제공의 길이가 똑같은 전형적인 벽면 방향의 첨차와 튀어나온 제공의 길이가 똑같은 전형적인 북방계통의 수법이다. 주두와 소로는 내반 된 곡선의 굽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공 포 사이 포벽에 뜬 소로를 가지고 있는 점은 이 집만의 특징이다. 무량수전 정면 중앙칸에 걸린 편액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이다.
내부 서쪽에는 불단과 화려한 닫집을 만들어 고려시대에 조성한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국보)을 모셨다. 협시보살 없이 독존으로만 동향하도록 모신 점이 특이한데 교리를 철저히 따른 관념적인 구상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불상을 동향으로 배치하고 내부의 열주를 통하여 이를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일반적인 불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장엄하고 깊이감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진입하는 정면 쪽으로 불상을 모시는 우리나라 전통 건축에서는 드문 해결 방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집을 만든 대목(大木)의 뛰어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대들보 위쪽으로는 후대 건물과는 달리 천장을 막지 않아 지붕 가구가 잘 보인다. 굵고 가늘고 길고 짧은 각각의 부재들이 서로 조화 있게 짜 맞춰진 모습은 오랫동안 바 라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이와 같은 무량수전의 천장 가구에서 고저장단의 운율을 느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천장을 노출시키려면 각각의 부재가 아름답게 디자인되어야 하고 또한 정확하게 짜 맞추어야 하므로 품이 훨씬 더 들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목수들은 이 러한 건물을 많이 지었다. 특히 고려시대 주심포 집들에는 천장을 가설하지 않은 것이 많다.
원래 내부 바닥에는 푸른 유약을 바른 녹유전을 깔아서 매우 화려하였다. 아미타경을 보면 극락세계의 바닥은 유리로 되었다고 하는데 녹유전은 이러한 이상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장엄 도구의 하나였던 것이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 측면 3칸 규모인데 평면의 경우 건물 내부의 고주 사이에 형성된 내진 사방에 한 칸의 외진을 두른 형식을 취했다. 기둥 사이의 주간 거리가 크고 기둥 높이도 높아 건물이 당당하고 안정감 있게 지어졌다. 지붕은 팔작 형식인데 지붕의 물매는 후대 건물에 비하여 완만하다. 예로부터 건물의 구조는 단면에 위치한 도리의 수를 셈하여 말하는데 이 집은 소위 9량 집으로 외목을 제외한 도리가 9개나 되는 큰 건물이다.
면석과 갑석을 짜 맞추어 만든 가구식 기단과 사갑석을 받치는 지대석이 돌출된 계단 ‚ 원형 주좌와 고막이를 가진 초석의 법식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기법을 계승한 것이다. 계단 동측면에 선각된 ‘ 충원적화면(忠原赤花面) 석수김애선 ’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무량수전은 고려시대의 법식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 주지만 그 가운데 가장 유의하여 볼 부분은 평면의 안허리곡(曲) ‚ 기둥의 안 쏠림과 귀 솟음 ‚ 배흘림 ‚ 항아리형 보 등 의 의장 수법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착시에 의한 왜곡 현상을 막는 동시에 가장 효율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하여 고안된 고도의 기법들이다.
안허리곡은 보통 건물 중앙보다 귀부분의 처마 끝이 더 튀어나오도록 처리한 것을 말하는데 기둥의 안 쏠림과 관계가 있다. 안 쏠림은 기둥 위쪽을 내부로 경사지게 세 운 것이다. 무량수전에서는 안허리곡과 안 쏠림이 공포와 벽면에까지 적용되어 마치 평면이 오목거울처럼 휘어 있다. 귀 솟음은 건물 귀부분의 기둥 높이를 중앙보다 높게 처리하는 것인데 수평 부재의 끝부분이 아래로 처져 보이는 착시를 막아준다. 기둥의 배흘림 역시 기둥머리가 넓어 보이는 착시 현상을 막기 위한 것인데 무량수전의 기둥은 강릉 객사문 다음으로 배흘림이 심하다.
무량수전의 공포 형식은 기둥 위에만 배치된 소위 주심포계인데 매우 건실하게 짜였다. 주두 위에서 공포의 짜임이 시작되고 벽면 방향의 첨차와 튀어나온 제공의 길이가 똑같은 전형적인 벽면 방향의 첨차와 튀어나온 제공의 길이가 똑같은 전형적인 북방계통의 수법이다. 주두와 소로는 내반 된 곡선의 굽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공 포 사이 포벽에 뜬 소로를 가지고 있는 점은 이 집만의 특징이다. 무량수전 정면 중앙칸에 걸린 편액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이다.
그렇지만 불상을 동향으로 배치하고 내부의 열주를 통하여 이를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일반적인 불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장엄하고 깊이감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진입하는 정면 쪽으로 불상을 모시는 우리나라 전통 건축에서는 드문 해결방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집을 만든 대목(大木)의 뛰어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대들보 위쪽으로는 후대 건물과는 달리 천장을 막지 않아 지붕 가구가 잘 보인다. 굵고 가늘고 길고 짧은 각각의 부재들 서로 조화 있게 짜 맞춰진 모습은 오랫동안 바라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이와 같은 무량수전의 천장 가구에서 고저장단의 운율을 느낄 수 있다고도 하였다. 이렇게 천장을 노출시키려면 각각의 부재가 아름답게 디자인되어야 하고 또한 정확하게 짜 맞추어야 하므로 품이 훨씬 더 들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목수들은 이 러한 건물을 많이 지었다. 특히 고려시대 주심포 집들에는 천장을 가설하지 않은 것이 많다.
안양루
안양루는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놓인 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무량수전과 함께 이 영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건물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달린 편액이 서로 다르다. 난간 아랫부분에 걸린 편액 은 ‘안양문’이라 되어 있고 위층 마당 쪽에는 ‘안양루’라고 씌어 있다.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안양’은 극락이므로 안양문은 극락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 따라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무량수전이 위치한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다.
안양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엎드려 모여 있는 경내 여러 건물들의 지붕과 멀리 펼쳐진 소백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스라이 보이는 소백산맥의 산과 들이 마치 정원이라도 되듯 외부 공간은 확장되어 다가온다. 부석사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많은 문인들이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의 장관을 시문으로 남겼고 그 현판들이 누각 내부에 걸려 있다.
조사당(국보)
조사당은 무량수전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산 중턱에 있다. 정면 3칸 ‚ 측면 1칸 규모의 작은 전각으로 측면 쪽으로 약간 비스듬히 진입하여 소박하고 간결한 느낌을 준다. 지붕은 맞배 형식으로 간단해 보이지만 넉넉하게 뻗어 나와 결코 작은 건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1916년의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장여 위의 묵서에 의하면 조사당은 고려 우왕 3년에 원응 국사가 재건한 것이다. 조선 성종 21년에 중수하고 성종 24년에 단청하였으며 선조 6년에는 서까래를 수리하였다.
자인당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 2구 (보물)
이 2구의 불상은 처음부터 부석사에 있던 것이 아니라 부석사 동쪽의 폐사지에서 옮겨 온 것이다. 양손이 깨어졌고 얼굴과 대좌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자인당의 두 비로자나불 좌상들은 세부 조각만 약간 다를 뿐 형태와 조각 양식이 거의 동일하여 같은 조각가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양감이 없는 경직된 신체와 형 화한 옷주름을 지닌 불상이나 다양한 무늬로 화려하게 장식된 광배와 대좌는 모두 9세기 후기 불상의 전형적인 특징들이다.
자인당 석불좌상
자인당에 2구의 비로자나불상과 함께 봉안되어 있는 이 불상 역시 부석사 동쪽의 절터에서 옮겨 온 것이다. 여러 형식들이 9세기 신라 하대 불상들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삼층석탑(보물)
무량수전의 동쪽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삼층석탑이다. 이 탑은 자인당의 석불들과 함께 이웃 절터에서 옮겨진 것이다.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은 전형적인 신라시대 석탑이다. 지대석과 하층 기단의 중석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는데 모두 8매 석으로 짜였고중석 각 면에는 2개씩의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다. 상층 기단의 중석은 각 면이 1매의 판석으로 짜였고 각 면에는 위 에는 2단의 탑신 받침이 있다. 그 위로 탑신부가 올려져 있고 옥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1매석으로 구성되었다. 각층의 탑신에는 각기 우주만 있을 뿐 조각을 새기지 않았다. 옥개석의 받침은 각층 5단이고 낙수면의 네 모서리는 약간 반전되었다. 3층 옥개석의 일부가 파손되었고 그 위의 상륜부엔 현재 노반과 넓적한 복발만이 남아 있다.
석등(국보)
부석사 석등은 무량수전 앞 중정 중앙에 세워져 있다. 따라서 무량수전을 진입하기 위해 안양루 계단을 오르면 제일 먼저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있다. 또한 석등 앞에는 석등의 부속물인 방형의 배례석이 현존한다. 이 배례석이 있는 부석사의 석등에는 의상(625~702)이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창건한 후‚ 그 제자들에 의해 법등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신라 하대 신림 이후 더욱 번성하여 건물의 중창은 물론 많은 인재가 배출되므로써 화엄종을 크게 일으키면서 석등과 같은 조형물이 조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곧 이 무렵은 신라 경문왕(861~874) 때로‚ 부석사가 위치한 太白山은 新羅五岳 중 北岳으로 숭앙되며 비중 있는 화엄종 본찰의 중심 무대가 됨에 따라 ‚ 사찰 내에는 석등 이외에 大石檀 ‚ 石龍 ‚ 長臺石 ‚ 石搭 등이 이 무렵 조성되었던 것이다. 한편 무량수전 앞 석등 외에 또 다른 석등 郡材 2기가 더 있는데, 하나는 무량수전 동쪽 언덕의 삼층석탑 앞에 위치한 석등이고‚ 다른 하나는 취현루 앞의 석등임을 옥개석과 간주석 파편 일부를 통해 알 수 있다.
당간지주 (보물)
이 당간지주는 부석사 창건 당시 세워진 신라시대의 석조 유물이다. 1300여 년 전의 이 당간지주에는 화엄종찰을 알리는 깃 대와 깃발이 꽂혀 있었겠지만 지금은 한쌍의 돌기둥만이 남아 있다. 당간지주는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에 다다르기 전 왼편 중 턱에 우뚝 서 있으며 그 키가 4.8m이다.
소조아미타여래좌상(국보)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 대사가 창건한 우리나라의 대표적 화엄종 수사찰인 부석사에는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물들이 전하고 있어 부석사의 유구한 역사를 증명해 준다.
현존하는 유물을 시대별로 살펴보면 신라시대의 것으로는 절 입구에 세워진 당간지주 ‚ 무량수전 동쪽의 석탑을 비롯한 3층석탑 3기 ‚ 석등 2기 ‚ 그리고 자인당에 봉안된 3구의 석불좌상이 있으며 고려시대의 유물로는 무량수전의 주존으로 봉안된 소조아미타여래좌상 ‚ 조사당에 그렸던 벽화 6점 ‚ 원융국사비 ‚ 그리고 화엄경 목판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의 유물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현재 괘불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승당지로 추정되는 곳으로 큰 석조와 맷돌이 남아있어 부석사의 사격(寺格)을 전하고 있다. 또한 경내에는 괘불대 ‚ 석등의 화사석 ‚ 불상광배편 ‚ 배례석 ‚ 장대석 등 석물의 부재들이 산재해 있다.
원래는 이보다 훨씬 많은 수의 우수한 미술품들이 있었겠지만 경내에 현존하는 유물들은 화엄종의 수사찰인 부석사의 지위와 유구한 역사에 비해 그다지 많은 수는 아니다. 더구나 이들 가운데 석불상들과 3층석탑 등은 부석사의 유물이 아니고 다른 절터에 서 옮겨온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주심포계 건물로 손꼽히는 무량수전과 여기에 봉안된 소조 불좌상 ‚ 현존 최고의 사찰 벽화인 조사당 벽화 ‚ 당간지주와 석등 ‚ 고려각판 등의 유물들은 모두 당대를 대표할 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 19 16년 무량수전의 해체 수리 때 대들보에서 금동 약사불입상을 비롯한 20여 구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13구의 불상들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조사당 벽화(국보)
부석사에 전하는 벽화 6점은 원래 조사당 벽면에 그려졌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벽체에서 분리하여 무량수전에 보관하다가 현재는 보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이들은 현 재 남아있는 우리나라의 사원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범천과 제석천 그리고 사천왕상을 그린 것인데 이 절의 창사주인 의상대사를 기린 조사당에 그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를 외호 하려는 의도로 제작한 듯하다.
범천
범천은 오른쪽(향좌)을 향한 측면관으로 서있는 자세이다.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 얼굴 뒤로 원형의 두광이 희미하게 보이며 앞으로 약간 내민 배 위에 두 손을 맞잡고 있다. 넓적한 얼굴에 긴 눈과 작은 입에서 위엄이 느껴지며 굵은 목 ‚ 넓고 듬직한 어깨 등이 전체적으로 풍부한 양감과 함께 건장한 인상을 풍긴다.
가슴께에 요대를 한 곤룡포 모양의 옷을 입고 있으며 소매 속으로 맞잡은 듯한 양팔 위로 드리운 천의가 발끝까지 늘어져 있다. 허리 아래는 박락이 심하고 후대에 색을 다시 입혀 정확한 묘선과 채색을 살필 수 없지만 풍만한 얼굴에 작은 이목구비 ‚ 옷단의 화려한 장식 문양 등 귀족적인 모습으로 고려시대에 제작된 존상으로 여겨진다.
제석천
범천과 마주 보이는 측면관을 취한 제석천은 화려한 보관을 쓰고 합장한 보살형이다. 아름답고 단아한 얼굴 ‚ 좁은 어깨와 날씬한 체구 등 여성스럽고 우아한 자태이며 정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구슬과 꽃으로 장식된 보관을 머리에 썼으며 보발이 어깨 위로 길게 내려와 있다. 합장한 양팔 위로 웃옷의 끝단이 좌우로 날카롭게 뻗쳐 있는 데 양팔에 걸쳐진 천의는 아래로 흘러내려 유연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이들 범천과 제석천은 모두 암녹색 바탕에 먹선으로 윤곽을 그린 후 진홍 ‚ 살색 ‚ 녹색 ‚ 등의 채색을 가했는데 얼굴이나 의복 등에 보이는 묘선은 매우 부드럽고 유연하게 흐른다.
사천왕
귀부인 같은 느낌을 주는 범천과 제석천과는 달리 수호의 임무를 맡은 사천왕상은 그들의 성격처럼 굴곡이 심한 활달한 곡선을 구사하 여 매우 생동감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동방의 수호신인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새털로 장식된 투구를 쓰고 왼손에 칼을 든 채 악귀를 밟 고 서 있다. 둥그렇게 부릅뜬 눈 ‚ 곱슬곱슬한 눈썹과 수염 그리고 울퉁불퉁한 코는 올빼미 같은 투구 장식과 함께 무섭다기보다는 희화적 (戱畵的)인 느낌을 자아낸다.
건장한 신체를 감싼 천의와 갑옷 역시 굴곡이 심한 묘선의 강조로 약동하는 천왕의 모습을 구체화시키려 하였다. 양다리 사이로 내려온 옷자락은 두 가닥으로 나뉘고 그 사이에 악귀가 그려져 있는데 단단히 눌려 옆으로 일그러진 입은 단순하지만 인상적이다.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어깨를 들어 올리고 몸은 오른쪽으로 틀고 있어 활달하고 율동적인 모습이다. 오른손은 배 위에 얹었고 왼손으로 화살을 잡고 있다. 가슴 쪽의 천을 묶은 매듭을 갑옷 아랫단과 경갑 위에도 그려 넣어 치 말하고 장식적인 느낌을 준다.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사천왕 가운데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외호신다운 위엄이 잘 나타난 작품으로 두 발로 악귀를 단단히 누르고 서서 칼을 잡고 있다. 갑옷에는 발밑의 악귀처럼 생긴 그러 태스크 한 귀면이 그려져 있다. 이들과 함께 여러 가닥의 천의가 몸 주변으로 복잡하게 흐르는데 약간 형식적인 형태이다.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은 오른손을 허리에 대 고 있으며 ‚ 다른 상과는 달리 한 발을 들어 올려 악귀를 밟고 있는 당당한 모습이다. 눈썹과 수염이 곧고 코와 입은 인간적인 모습이다. 광목천왕처럼 귀면 장식이 여러 개 붙은 갑옷을 입고 있으며 왼손에 긴 창을 쥐 고 있다.
이상의 벽화들은 현재 박락(물건이 오래되어 긁히고 깎이어 나감)과 개채(색을 다시 입힘)가 심하여 정확한 양식을 살피기 어렵다. 이 벽화들의 제작 연대는 지금까지 조사당 장여 묵서명의 기록대로 1377년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도리 하단에 1201년에 개채 한 것을 다시 1493년에 개채 하였다 고 한 묵서명의 기록으로 보아 1377년 제작설은 제고해 보아야 한다. 또한 사천왕상의 표현 기법은 [인종일채]의 선각 천부상과 같은 12세기 작품과 비교되며 ‚ 14세 기 불화의 양식보다는 유연하고 세련되었기 때문에 이들 벽화의 제작 시기는 14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고려 각판 (보물 제735호)
각판은 부석사에 소장된 정원본(貞元本) ‚ 진본(晋本) ‚ 주본(周本)의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새긴 목판으로 13~14세기에 제작되었다. 대방광불화엄 경(大方廣佛華嚴經)은 크고 방정하고 넓은 뜻을 가진 부처님의 설법을 화려한 꽃으로 장식한 것 같은 경전이다. 부석사 화엄경판은 우리나라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 사가 창건하여 화엄사상을 발전시켜 나간 부석사에 소장되어 그 가치가 더욱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