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재 정개청(困齋 鄭介淸, 1529-1590)과 자산서원(紫山書院)
자산서원(紫山書院)
전라남도 함평군 엄다면 엄다리 제동마을
곤재 정개청(困齋 鄭介淸, 1529-1590)선생은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세상을 떠났다. 자산서원은 1616년 제자들이 스승의 신원운동을 전개하면서 세운 서원이다. 1678년 조정으로부터 자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나 계속되는 남인과 서인의 당쟁으로 훼철과 복설(復說)을 되풀이하였다.
이후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이르기까지 무려 5차례의 훼철을 당하였고 1957년에 복설된 뒤 1988년 대규모의 복원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1987년 유형문화재 제146호로 지정된 정개청 문집 『곤재 우득록(困齋 愚得綠)』 목판이 소장되어 있다.
곤재우득록목판(困齋愚得綠木版, 유형문화재 제146호)
자산서원에 보관된 정개청 문집의 목판으로 고성 정씨(固城 鄭氏) 종중에서 관리한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선생의 문집 『우득록』은 이기설(理氣說)을 비롯한 문학·철학·천문·역학 등 334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부록까지 합하여 4권이다. 1∼2권은 성리제설과 강의계서가 수록되어 있고, 3권에는 소답·서·제·문이 실려 있다. 서문은 허목(許穆)이 1681년에 지었으며, 부록은 상권에 곤재의 세계와 사실이 수록되어 있고 하권에는 곤재행장, 곤재전이 실려 있다.
『우득록』의 각판작업은 곤재의 필초본을 숙종이 보고 1689년 명을 내려 시작되어 1692년에 완성되었으며, 부록은 1703년에 완성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각판은 모두 48매뿐이며, 원래의 108매 가운데 반 정도만 남아 있다. 이 목판은 당시 호남 사림의 인맥과 활동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
곤재 정개청(困齋 鄭介淸, 1529-1590)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의백(義伯), 호는 곤재, 아버지는 세웅(世雄)이다. 어려서 중이 되어 보성의 영주산사(瀛州山寺)에 들어가 풍수설 및 성리학·천문·지리·의약·복서 등을 배웠다. 그 뒤 박순(朴淳)에게 10여 년을 배우고 1574년 전라감사 박민헌(朴民獻)의 천거로 1585년 교정청낭관을 거쳐 영릉참봉, 나주훈도, 전생서주부, 곡성현감을 지냈다. 서인인 영의정 박순이 파직되자 동인인 정여립(鄭汝立), 이발(李潑) 등과 친교를 맺었다.
1589년 『절의청담변(節義淸談辨)』을 지어 자신의 처지를 변명했으나 되려 배절의론(排節義論)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정여립모반사건에 연루되어 1590년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되었고 함경도 경원으로 이배(移配)된 뒤 그곳에서 죽었다.